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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기 ^^

2007.04.23 22:53 조회 수 : 11888 추천:274

오일러를 기억해봅시다. ^^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천재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 탄생 300주년(1)
수학계에서 떠도는 농담 중에 “제대로 되었다면 정리와 법칙 가운데 절반은 오일러의 이름이 붙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수학자 오일러의 업적이 그만큼 빼어났다는 것을 반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올해 4월 15일은 오일러가 탄생한 지 꼬박 3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에 본지는 18세기 최고의 수학자로서 오늘날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오일러에 대해 알아보는 기획기사를 게재한다. [편집자 註]  



  
▲ 레온하르트 오일러  ⓒ  
흔히 세계사에 길이 남은 천재들을 떠올릴 때 더불어 생각나는 이미지들이 있다. 괴팍하거나 아주 내성적인 성격, 혹은 정신질환이나 은둔생활 따위가 바로 그런 단어들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천재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아주 다른 성격을 지닌 채 특별한 삶을 살다 간 경우가 많다.

하지만 수학 천재로 불리어지는 오일러의 경우는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는 아주 자상하고 너그러운 성격이었다. 야채를 손수 기르는 일상적 취미와 함께 13명이나 되는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오일러는 1707년 4월 15일 스위스 바젤에서 칼빈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때문에 그는 아버지의 바람으로 한때 바젤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학에 관한 천재적인 재능을 오래 감추어둘 순 없었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인 요한 베르누이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된 오일러는 어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일주일 내내 수학 공부에 매달리고도 휴일의 쉬는 시간에조차 스승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어 베르누이가 짜증을 낼 정도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베르누이에게 인정받은 그는 20세 때인 1727년 표트르대제가 설립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 임용되었다. 당시 그곳으로 초청받은 요한 베르누이의 아들인 다니엘 베르누이가 그를 끌어들인 것이다.

하지만 오일러가 처음 임명된 곳은 수학이 아닌 의학부였다. 따라서 그는 임명된 후 생리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때 귀의 생리학을 공부하면서 음향의 본성과 전파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바로 여기서 잘 드러난다.

이렇게 새로운 공부를 하던 그에게 기회는 곧 돌아왔다. 다니엘 베르누이가 다시 스위스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오일러는 그 뒤를 이어 수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연구에 빠져들어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다.

기하학, 수론, 순열조합론 등 수학의 다양한 분야뿐만 아니라 역학, 유체역학, 광학 등 응용분야까지 연구 범위를 넓혀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파리학사원 상을 받기 위해 그는 어려운 문제를 단 사흘 만에 풀었다. 그것은 저명한 수학자들이라 해도 몇 개월의 시간을 요하는 문제였다.

이런 문제를 사흘 내내 긴장한 상태로 집중한 결과, 갑자기 오른쪽 눈이 안보이게 되었다. 3년 전에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열병을 앓은 후 눈에 이상이 있던 차에 결국 오른쪽 눈을 실명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오일러의 초상화가 대부분 왼쪽 옆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이런 속사정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신체적 결함 역시 그의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한 치도 흐트려 놓을 수는 없었다. 예전과 다름없이 왕성한 연구를 계속한 오일러는 1747년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당시 러시아의 억압적인 정치 상황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를 초청한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수학을 장려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오일러의 재능을 잘 알고 있던 대왕은 그에게 주화와 연금제도, 운하, 하수 등의 실질적인 문제를 맡겼다.

그러나 베를린에서의 생활도 오일러가 생각한 것처럼 이상적이지는 않았다. 수학을 잘 하지 못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경멸하는 듯한 어조로 오일러를 ‘수학의 사이클롭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사이클롭스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으로서, 칭찬일 수도 있는 이 말이 실제로 외눈박이인 오일러에게는 매우 듣기 거북한 말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프리드리히와의 관계가 좋지 않던 차에 때마침 러시아에서 오일러를 초청했다. 예카테리나 2세의 간절한 요청을 받아들여 오일러는 1766년 다시 러시아로 돌아갔다. 하지만 연구에의 집념을 불태우며 러시아로 다시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완전한 암흑의 세상이었다.

  
▲ 오일러의 묘지  ⓒ  
돌아온 직후 백내장을 앓은 그는 이내 나머지 왼쪽 눈의 시력마저 잃게 되었다. 수학자에게 있어 실명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행을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한쪽 눈을 잃었을 때 “한 눈으로 보니 모든 현상이 또렷이 보인다”고 했던 그는 양눈의 시력을 다 잃고 난 후에 “이제야 양쪽이 같아져서 덜 혼란스럽다”고 했다.

그것은 포기가 아니었다. 그에게 실명은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그는 양눈의 시력을 잃기 얼마 전부터 아들과 함께 눈을 감은 채 수식을 종이에 쓰는 연습을 수없이 했다고 한다. 자신이 어떤 것도 볼 수 없을 때를 대비하여 미리 암흑의 세계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렇게 맹인된 그는 이후 비서가 받아 쓸 수 있도록 구술을 하거나 큰 칠판에 분필로 공식을 써가며 연구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다 76세이던 1783년 9월 제자와 함께 천왕성의 궤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남에게는 친절하고 다정다감했으나 자기 자신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엄격했던 그는 그렇게 조용히 세상을 떠나갔다. 너무나 인간적이고 너무나 긍정적인 그에게 있어 암흑은 오히려 새로운 진리를 볼 수 있는 혜안이었지 않았을까.

http://www.sciencetimes.co.kr/data/article/20000/0000019489.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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