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임팩트가 가장 큰 사람은 누구일까?
예수라고 하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라고 하니, ‘사람’이라는 데 약간의 이의를 달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사람’으로 오신 것이니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성탄절이 다가오는데, 크리스마스처럼 사람들이 그 주인공의 정체를 모르면서 지내는 명절도 없을 것이다. 참 기묘한 일이다. 예수는 윤리 선생이나 인생을 바르게 살라고 가르친 현자가 아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가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성찰해 보면, 결론이 단순하지 않아 마음이 불편해진다. 정말 하나님과 동체거나 아니면 제정신이 아닌 과대망상증 환자, 심하게 말하면 미친 사람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미친 사람이 태어난 날을 기리는가?
예수의 정체에 대한 고민과 혼란은 예수 당시의 사람들도 고스란히 겪은 것이다. 여러분이 믿건 안 믿건 간에, 내가 아는 대로 성탄절의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가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이건 내가 발굴해 낸 것이 아니다. 내가 여기저기서 읽은 것이고, 아는 사람들에겐 잘 알려진 내용이다.
성경
성경은 하나님이 써 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부르는 대로 받아 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USB 메모리로 전달해 준 것도 아니다. 따라서, 성경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신약성경에서도 복음서간 같은 일을 두고 약간씩 다르게 기술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존재했던 많은 필사본들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에 성경을 필사해서 전달하고 퍼뜨렸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신성한 글이라고 생각하고 베껴 쓰는데 오류가 없도록 성실한 노력을 다했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에 대한 많은 글 중 4세기에 정경을 정할 때 포함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 배제된 것들을 외경과 위경이라고 하는데, 신학자들이 이것들은 본래의 뜻에서 벗어난 의도가 가미되어 쓰여진 것으로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다. 이에는 좀 차이가 있어 카톨릭에서는 성경에 포함시켰지만, 개신교에서는 배제시킨 것들이 있다. 또, 지금까지 성서학자들이 무지 많은 노력을 해서 복음서 중에서도 후세에 삽입된 구절 같은 부분들도 찾아냈고, 일부는 그런 판단에 의해 삭제했다. 그래서, 성경내의 어떤 절은 “(없음)”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탄생
예수가 12월 25일에 탄생했다는 증거는 없다. 예수의 탄생 해를 기준으로 기원전과 후를 분류하지만, 실은 이 탄생 년도도 틀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예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정하게 된 계기가 로마의 태양교와 관련 있다고도 하며 이 때문에 일부 기독교 종파에서는 과거에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을 이교도의 흔적이라고 거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안 믿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 하나가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대목이다. 요새의 생물학 연구에 비추어 보거나,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할 때, 못 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서는 이런 이의도 있다.
유대인들은 구세주가 동정녀에게서 날 것이라고 믿었었는데, 이는 구약성경의 하나인 이사야서에 그리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은, 이는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성경을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젊은 여자’를 뜻하는 단어를 ‘처녀’로 오역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도킨스 같은 사람도 기독교가 옳지 않다고 하는 하나의 근거로 삼고 있다.
어쨌든 신약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두 복음서보다 먼저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바울의 서신서들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아예 없다. 이는 당시 사도들과 신도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고 아마 탄생 자체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기 때문일 수 있다.
가르침
예수의 어린 시절이 외경이 아니라 정경에 나타나는 것은 한 구절뿐이고, 따라서 어린 시절은 베일에 싸여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약을 기록한 사람들이 예수의 어린 시절을 알아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예수가 실제 성경에 등장하여 활동한 시기는 3년이다.
예수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등등의 많은 훌륭한 가르침을 주셨지만,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당시 구약의 예언에 따라 구세주가 나타나길 바라고 있던 유대인들이 원했던 구세주란 모세처럼 유대인을 구출해서 독립국가를 만들어 준다든가 하는 거였지 이런 게 아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당연히 로마도 자신들이 다스리는 민족에서 반란 지도자가 나오지 않을까 감시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예수가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영생 때문이다. 예수가 내세운 것이 나를 믿으면 돈을 많이 벌 것이라든가, 나를 믿으면 편하게 살 것이라든가, 남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든가, 나를 따르면 로마와 투쟁해 너희 국가를 만들어 주겠다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의 핵심 주제는 이거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고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기에 하나님 기준에 사람들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모두 죄인들이다. 그래서 모두 멸망시켜야 하는데, 이를 구제해 주기 위해서, 예수를 보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도 하여서 자신과 동체인 예수를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게 해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을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을 믿기만 하는 사람은 모두 구원을 해 주고 영생을 준다는 거다.
죽음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이야기 한다. 표적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요나는 구약성경에서 큰 물고기에 삼켜졌다가 사흘 만에 뱉어내어 진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이를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사흘만의 부활을 뜻하는 것으로 삼는 것이다. 이 외에도 예수는 아예 직접적으로 자신이 죽음을 당할 것과 부활할 것을 이야기한다.
예수를 죽이자고 한 것은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혼란스러운 존재였다. 도덕적 가르침과 기적을 행할 때는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문제는 예수가 자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예수의 말씀을 듣다가 화를 낸 사람도 많았다.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도 예수가 미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를 설득하려 만나려고 시도한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끝내 예수를 죽이려 하게 되었다. 예수의 죄목은 신성모독죄였다. 예수의 처벌을 논하는 공회에 증인이 나타나 이야기했다. 저 사람은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지을 것이다”라고 말했었다고. 이건 그들에겐 당연히 매우 불경하고 건방진 말이었다. 그런데, 이건 예수가 자기의 죽음과 사흘 후의 부활을 암시한 말이었었다. 이 공회를 주관한 대제사장이 마지막으로 예수에게 묻기를, 하나님께 맹세하여 말하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한다. 그리고 예수는 그렇다는 취지의 답을 한다. 이에 대제사장은 분노하고 결국 로마 관리(총독)에게 넘겨, 당시 죄인을 처참히 처형하는 방법이었던 십자가형에 처하게 한다. 그리고 예수는 모욕을 당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십자가에서 한 번 내려와 봐라, 자기 자신도 구원 못하네 등의… 이 과정에서 예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세 번 예수를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 보고 당신은 예수를 따라 다니던 사람이 아니냐 하고 물으니 아니라고 한 것이다.
부활
예수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예수가 말했던 대로 예수가 부활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총독을 찾아가 예수 무덤을 잘 지키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사흘 후 예수의 시신이 사라졌다. 그래서 관리는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소문을 내게 했다.
예수를 잃은 제자들은 마땅히 뭘 해야 할지도 모르고 낙담해서 다시 생업에 종사하려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한 예수가 나타났고 또 제자들이 모인 중에도 나타난다. 물론 예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 자리에 없던 제자인 도마는 예수가 부활해서 나타났다는 말을 다른 제자들로부터 들었을 때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이 직접 예수가 창에 찔리고 못질을 당한 상처를 만져 보아야 믿겠다고 했다. 예수는 도마에게 나타나 도마에게 그리 해보게 했다.
승천과 전도
부활한 예수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라는 말을 제자들에게 남기고 40일만에 승천한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한다. 그 후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게 되고, 제자들은 확신에 찬 사람들이 되어 전도를 한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들을 안 믿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소설을 섞어 쓴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참으로 부인하기 어려운 놀라운 일이다. 예수의 죽음 후 방황하던 예수의 제자들이 갑자기 확신을 갖고 열심히 전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바울의 전도를 주로 설명한다. 그리고 신약에는 많은 바울의 서신서들이 들어 있다.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라고는 하지만, 예수가 죽는 날, 자신도 해를 당할까 겁을 먹고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갑자기 죽음을 무릅쓰고 전도를 한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던 예수를 말리러 갔던 예수의 동생들이 쓴 글도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바울은 당초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다. 그는 율법학자로서, 스데반이 순교할 때, 즉,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일 때에 소극적 동참을 한 사람이다. 그리고, 스데반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색출하여 처벌받도록 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런데, 부활한 예수가 그를 찾아 온 후 180도 변해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 전도를 하게 된다. 바울이 전도 여행을 다닌 거리는 직선거리로만 따져도 총 13,400 마일이라고 한다. 이런 노력을 통해 기독교는 당시 가장 팽창한 상태로 있던 로마제국의 곳곳으로 전파된다.
그 후 잘 알려진 것처럼,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한다. 당시 타시투스라는 역사가가 네로 황제 시절에 대해 썼다는 글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네로는 소문(64년의 로마의 화재가 황제의 소행이라는)을 진정시키기 위해 범인들을 날조, 당시 이상한 신을 믿어 미움 받던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던 이들에게 교묘한 고통을 가했다. 그리스도인이란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본디오 빌라도 총독이 처형한 그리스도에서 온 명칭이다. 당장에 탄압을 받았던 이 혐오스러운 미신은 이 악이 태어난 유다에서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끔직한 것들이 흘러 들어와 많은 추종자를 얻는 로마에도 역시 전파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죽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 씌워 개가 물어뜯도록 하는 놀이를 즐겼다. 아니면 그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인화성 물질을 발라서 해가 지면 횃불처럼 어둠을 밝히도록 만들었다.”
이러던 로마가 4세기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절에 이르러 기독교를 국교로 삼는다. 이것이 미술, 음악, 문학 등등의 서구 문화에서 그리도 많은 예수의 영향이 나타나는 시작이 되고 기독교가 온 세계에 이리도 넓게 전파되는 출발이 된다.
정말, 예수는 로마제국이 번성하여져서 기독교를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을 “때가 차매” 탄생했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이상이 대략의 스토리다.
믿는 사람에게는 이 우주를 만드신 절대자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죽으셨다는 것은 놀라운 감격의 대상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안 믿는 사람들에겐 성탄절은 그저 선물을 주고 받고, 데이트를 하고 하는 즐거운 휴일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가 누구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면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게 된다.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니 누구든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 할 인물이다.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이유는 신약성경을 진지하게 읽어 보면 그 주제가 아주 일관성을 갖고 흐른다는 점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좀 길지만 요한복음에 나온 다음 구절을 정독해 보자.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는 물론 예수님이 아직 잡히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다.
이 다음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이런 논란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미친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Merry Christm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