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을 보내 드리고

2012.03.04 05:03

이병호 조회 수:6051

여러분들이 너무도 수고를 해주어, 나만 아니라 모든 가족이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어떤 조문객들은 무슨 사유로 저렇게 젊은 청년들이 많이 도와주는지 물었다고 한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수고했으니, 가신 내 아버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간단히 여러분에게 이야기 해야 할 것 같다.

 

19339월 평안도에서 나셨다.

집안은 과거시험 1차에 합격한 진사 집안이었고 (오래 전 돌아가신 할머니는 이걸 크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부자집안이었다고 한다. 오산학교 설립시 큰 기부를 한 집안이었다.

 

해방 후 북한지역이 공산화 되면서 어린 이 소년(내 아버지)은 학교에서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소위 자아비판이란 것을 학교에서 학생들이 하게 만들고 학생들은 처음엔 장난 비슷하게 그런 걸 마치 놀이처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놀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왔는데, 소년의 아버지(내 할아버지)너 나하고 서울 갈래?”라고 물으셨다. 당시는 이미 남북간 왕래가 차단된 상태였고, 내 할아버지가 내 아버지에게 물으신 것은 쪽배를 몰래 수배해 두었으니 오늘 밤에 그걸 타고 남한으로 도망을 같이 가겠냐는 것이었다. 소년의 어머니, 누나, 여동생을 모두 두고 소년의 아버지와 단 둘이 도망가겠냐는 거였다. 형편상 다 갈 수는 없고, 아들만 데리고 북한을 탈출하겠다는 거였다. 소년은 망설이다가 라고 했다. 여러 생각이 있었겠지만, 똑똑하단 소리 듣고 공부 잘 하던 소년은, 서울 가서 제일 좋다는 경기학교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그 날 밤 소년과 아버지는 쪽배를 강에서 타고 황해로 향했다.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큰 중국 선박을 만났는데, 말이 안 통하지만 그 사람들이 자기 배에 타라고 몸짓을 하였는데 겁이 나서 타지 않았다. 표류 끝에 다행히도 인천으로 올 수 있었다. 인천항에 오니 그 중국배가 정박해 있더라고 하셨다.

서울에서 소년과 아버지는 거지나 마찬가지였다. 몸뚱이만 갖고 먹고 사는 길을 찾아야 했다. 북한에서 소위 지주였으니 고생이란 걸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앞에 고생길만 훤히 열려 있었다.

 

소원대로 아버지는 경기학교에 응시했고 필기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보았다. 면접관이 등록비를 낼 수 있느냐는 등의 경제적 형편을 물었다. 사유는 모르지만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용산고등학교에 갔다.

 

다행히도 북한에 남아있던 소년의 어머니와 누이들도 추후 월남하는 데 성공했다. 찾고 찾아 내 할머니가 내 아버지를 토굴 같은 데서 만났는데 얼굴이 까만 소년은 그 어머니를 보면서 눈만 껌벅껌벅 했다고 했다. 살아 생전 내 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몇 번 하시면서 정이 없는 놈이라고 정말 섭섭해 하셨다.

내 아버지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평생 동안 계속되었다. 나를 좋아하셨지만, 표나게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다. 세 아들 중 소위 세상 기준으로 내가 제일 잘 난 아들이었지만, 한 번도 나만 특별히 생각한다는 낌새를 주신 적이 없으셨다.

 

당시 모든 한국인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우여곡절이 연속되는 전쟁기간, 운전병으로 군대 복무를 마치고 내 아버지는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하셨다. 10회 졸업생이다. 서울대 전기공학과 박영문 명예교수님, 경희대 이주희 명예교수님과 동기시다. 이주희 교수님이 나를 특별히, 더 각별히 생각하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주희 교수님과의 관계를 이야기 하자면 할 말이 많지만, 주제엔 맞지 않고이주희 교수님 등 전임 학회장님들 7분과 현 광학회장님, 차기광학회장님이 직접 찾아 오셔서 위로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특히, 몇 분 전임회장님들은 건강이 썩 좋지 않으신, 정말 우리나라 광학계의 원로분들이신데, 직접 빈소로 찾아와 주신 게 나로서는 너무 죄송스럽기도 하였다. 내가 보답을 받고자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회를 위해 내가 일하는 것을 모든 전임회장님들이 특별히 생각해 주시니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내 아버지는 내 큰외삼촌과 같은 학과 동기동창이시다. 이유는? 큰외삼촌이 내 아버지를 자기 여동생과 결혼시켰기 때문이다. 강릉까지 기차 타고 데리고 가 소개를 시켰는데, 내 어머니는 내 아버지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으셨다. 삐쩍 마르고 까맣고 말도 없는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신혼여행은 온양으로 기차 타고 갔는데, 가는 내내 내 아버지는 내 어머니에게 별로 말도 붙이지 않았고 물 하나 사주지도 않으셨다는 게 내 어머니의 증언이다.

내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셨다. 말 수가 없고 재미 없는 사람이셨다. 원리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여러 조문객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다. 술 담배를 많이 하셨었다. 술은 항상 소주였다. 양주는 있으면 좋아서 드셨지만 양주 이름과 종류도 잘 모르셨다.

 

대학 졸업 후 한국전력에 입사하여 정년퇴직 하실 때까지 근무하셨다. 전주, 강릉, 순천 등 여러 군데 전근을 다니셨다. 항상 원칙에 충실하여 타협을 모르셨고 남에게 아부성 발언도 전혀 하실 수 없는 스타일의 사람이셨다. 그래서, 출신학교에 비해서는 꼭 좋은 자리로만 다니지 못하셨고 좋은 자리에서 정년을 맞지 못 하셨다는 게 내 개인적 생각이다. 정년퇴직 후에는 대한전기협회에 나가시면서 일본어 규정집들을 번역하는 일을 오래 하셨다. 다니시는 게 힘들어지기까지는아주 꼼꼼한 스타일이셨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 기뻐하셨고, 내가 공과대학을 수석졸업 할 때 기뻐하셨고, 유학 갈 때 기대에 차셨고, 모교에 돌아올 때 좋아하셨다. 내가 당신이 졸업한 학과의 교수란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것으로 보였다. 대리만족일 수도 있다. 아버지는 학자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는데, 대학 졸업후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한국전력에 가셨다.

 

내가 어렸을 때 기억 나는 일 하나는 아버지가 신문에 딸려오는 영어 회화 자료를 모아 열심히 공부하셨다는 거다. 왜 그러시냐고 물으니, 나중에 어머니를 데리고 세계여행을 하겠다고 하셨다. 어떻게 되었냐고? 아버지는 문법은 잘 아셨지만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고 말할 수 없었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세 번 오셨었고, 단체여행으로 몇 번 어머니와 함께 외국에 가셨다. 일본어를 잘 하셨는데, 나와 내 집사람이 모시고 갔을 때에는 귀가 좀 어두워 지신 후라 일본어로 대화를 하시기 어려웠다. 결국 나와 내 집사람이 영어로 물으며 여행을 다녔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외국어 공부는 성공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 아들인 내가 외국에 숱하게 다닌다. 내가 외국에 가서 뭘 하는지 늘 궁금해 하셨다. 초청발표를 하는 걸 자랑스러워 하셨고 OSA 이사회 활동을 하는 걸 자랑스러워 하셨다.

 

그런 내 아버지가 가셨다.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시고 아들 셋 중 둘은 교회에 다니지만 아버지는 병원에 가기 전까지 믿음을 거부하셨었다. 폐암 판정을 받으시고 이젠 결국은 돌이키기 어렵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아버지도 알게 되셨을 때에도 아들들의 전도를 거부하셨다. 어머니는 누우신 아버지 옆에서 내내 성경을 베껴 쓰셨지만, 아버지는 미동도 않으셨다. 내가 말을 꺼내면 죽을 때까지 아버지 생각대로 살다 갈 테니 괴롭히지 말라고 역정을 내셨다. 죽음이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생명에 대한 구차한 미련이 없으셨다. 다만 원칙주의자답게 의사의 말대로 따랐다. 의사가 시험적 약을 써보는 걸 고려하겠다고 하면 그러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화장되길 원하셨다.

 

지난 12월 중순에 폐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고, 약의 부작용으로 목이 아프셨다. 지난 주 사흘을 아무것도 못 드셔서 영양제 주사를 맞고 집에 오신 후 악화되어 동생이 119를 불러 응급실로 모셨다. 면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폐렴이 온 것이다. 숨쉴 수 있는 허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산소를 강제로 넣고 이산화탄소를 강제로 빼기 위해 병원에서는 인공호흡기를 씌웠다. 고압으로 공기를 넣고 빼는 기계라 착용하는 환자는 무척 괴로운 기계이다. 간호사들의 말에 따르면 보통 두 시간도 쓰고 있기 어렵고 모든 사람이 그걸 떼 달라고 하고, 발로 차고 하며 거세게 반항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내 아버지처럼 오래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다. 내 아버지도 의식이 돌아오면 그걸 벗겨달라고 했다. 말씀은 못하시지만 손짓으로 그리고 눈빛으로 말씀하셨다. 화난 눈을 하시기도 하셨고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시기도 하셨다. 수시로 손으로 직접 마스크를 벗어 버리려 하셨기 때문에 가족들이 번갈아 가며 밤새도록 여러 날을 지키며 손을 제지해야 했다.

내 집사람이 예수님을 믿으시라고 눈물로 호소했고, 나도 그렇게 했다. 그렇게 완고하시던 아버지가 고개를 끄떡였다. 어머니는 천주교 대세를 받게 하셨고 형은 목사님을 모셔 세례를 받게 했다.

나는 좀 불안했다. 아버지가 자식들이 불쌍해서 그냥 들어주는 척 하신 게 아닐까?

다음날 확인했고 아버지는 고개를 끄떡이셨다.

 

인공호흡기를 안 하면 이산화탄소를 못 빼어 의식을 잃게 된다고 했다. 의식이 돌아오면 아버지는 인공호흡기를 떼려는 힘없는 손짓을 계속 하셨다. 수시로 가래를 제거해야 했는데 그게 또한 큰 고통이었다.

결국 의사가 폐렴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신장이 손상되어 회복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인공호흡기를 떼려면 가족 동의를 받아 오라고 했다. 떼자는 사람들과 안 된다는 사람간에 고성이 오가며 싸움이 났다. 어머니는 폭발하셨다. 내 집사람은 내 아버지가 저걸 쓰고 돌아가시면 천추의 한이 될 거라고 울며 매달렸다. 결국 떼는데 모두 동의했다. 마스크를 뗐다. 우리의 마음이 너무 편해졌다. 아버지는 10시간을 더 사셨다. 마지막이 가까워 오며 나와 집사람은 요한복음을 읽었다. 남아있는 시간을 알 수 없어 뒤로 가며 집사람의 낭독 속도가 빨라졌다. 다 읽었다. 형과 형수도 성경구절들을 찾아 읽으며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돌아가실 때 내 조카는 천사를 봤다고 하고, 내 집사람은 아버지 가슴이 분홍빛이 되어 내 눈이 왜 이렇지?’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환영을 본 것이거나 착시일 수 있다. 우린 거기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하지만, 나와 내 집사람의 마음은 너무도 편했다. 예수님을 받아 들이셨다는 것과 소원대로 마스크를 떼어 드린 후 10시간 편히 계시다가 편안히 가셨다는 게 너무 좋았다.

 

응급실로 실려가신 후 장례까지 모두 1주일 걸렸다. 아버지는 가족을 1주일만 고생시키셨다.

장례절차는 순조로웠다. 나는 문상객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장례 비용을 좀 걱정했었다. 작은 빈소를 마련하려 했으나, 하나 비어 있는 것이 작지 않은 곳뿐이어서 그리 하였다. 많은 분들이 조화를 보내 주시고 조의를 표해주셨다. 장례 비용 걱정은 기우가 되었다.

10여 년 전 어머니가 아버지와 의논하여 마련해 두신 천주교 추모공원의 자리에 모셨다. 신자만 묻힐 수 있기에 아버지는 말씀을 하실 수 있을 때까지는 화장을 하라고 하셨었지만 마지막에 어머니가 말씀을 못 하시는 아버지에게 거기 모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 되었다. 매장지를 파 보니 땅이 좋다고, 이것도 가신 분의 덕 때문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

 

유가족의 표정들이 밝았다. 어떤 분은 빈소가 장례식 분위기가 아니라고 했다. 편안히 가신 게 너무 기뻤다. 조문객과 인사하며 내 표정보다 조문객 표정이 훨씬 심각하구나 하고 여러 번 느끼고, 아 내가 너무 밝은 표정을 지으면 안 되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 아버지는 가셨다.

이제부터 빈자리가 좀 느껴지겠지. 많은 추억이 남는다. 내게 운전을 가르쳐 준 사람도 내 아버지였다.

 

여러분의 수고에 고맙게 생각하고, 조의를 표해 준 모든 졸업생들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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